사진 예술론(만레이를 중심으로)

 

사진예술론 ver 0.1
철학과 예술의 상관관계를 짚어내는 일은 만레이 사진에 관한 이야기에 앞서 서두에 자리를 이렇게(?) 시작하는 것만큼이나 소소한 사고이지만, 다시 한 번 만레이라는 사진가의 이름이 내포하는 사회적 위치나 예술적 고려의 상징적 측면을 바라본다면, 고리타분하면서도 본질적인 이야기를 앞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출현했고 그 인간의 모든 인위적인(artificial) 행동은 곧 문화였다 이 문화의 움직임은 역사이고 이런 것들이 일어나는 모든 본연적인 원류는 개개인의 그리고 인간이라는 동물의 심리적인 결과물이다. 곧 정신활동의 물리적 행위는 예술이라는 심미적 정신의 상황과 기술적 결과로 나타나기 마련이었고 정신활동이 우선이라는 부연을 잊지 않는다면 철학(philosophy1)) 과 예술의 차이는 사실 범주적이고 개념적 구분이라는 미세한 틈새만 존재 하게 되는 것이다 조금 거칠게 다룬다면, 예술은 모호한 개념으로 끊임없이 논리적이고 또한 비논리적인 인간의 상황을 숲과 같은 넓은 개념으로 세상과 인간에 대해 그려왔다면 철학은 논리적이고 또한 비논리적인 세상과 인간을 나뭇가지와 같이 얽혀있는 논리적 사고의 틀로 범주화 하는데 노력했다 조셉켐벨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에게 고하는 방식을 철학은 어렵게, 예술은 쉽게 풀어오는데 주력한 것이다.

철학과 예술이 어떤 방법으로 인간에게 말하는 방식을 마스터해왔는지에 대한 차이를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의 정신(심리)과 그 정신활동 그리고 그로 인한 물리적 결과들(이는 바로 문화이고 인류의 역사이다)은 아주 유사한 방식과 사고로 고려되었고 이러한 지점에서 퓨전이나 혼성모방을 논하는 것은 역시나 있어왔던 일에 범주적 개념을 덧 데는 일일뿐이다 애초에 철학과 예술이 인간에 관심적 시선을 두었던 것은 당연하였고 이 둘은 사실 명확한 구분 없이 사고 되어왔다 기술과 결부되어 물리적 결과로 나오는 작품들은 철학적 사고에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작품이 되어버린 철학은 다차원의 철학을 다시 응용시킨다. 탈레스 이후에 소크라테스를 본격철학의 시점으로 보자면 그들의 사고는 언제나 심미적 예술적 사고와 같이 하였고 예술에 관한 적극적 개입을 하이브리드라는 거창한 말없이 수순의 과정으로 행하였다. 예술이 자연의 일부분인가 모방인가 재창조인가에 대한 문제부터 서사형태의 예술이 가지고 있는 개념적 기법들까지 실상 그들의(철학자) 모든 사고는 고도의 심리적 ‘마스터피스’들인 예술(품)을 저울질 하는 것이 다인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예술가는 철학자의 진언에 귀 기울이고 영향을 받지만 철학자 역시 예술가에게서 범주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이 둘의 명백한 갈림길은 결과물의 형태에서 드러난다. 철학은 ‘사랑’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려 수백 권의 책에서 유기적 사고를 해낸다. 종합, 재구성이라는 지루한 과정으로 사랑이라는 말을 논리적이고 범주적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그 모양새는 ‘사랑을 설명하고 있는 현학적 지식에 거꾸로 제한 당한다 하지만 예술은 그렇지 않다 사랑이라는 쉬우면서도 어려운 논제를 음(音)으로 시각으로 글이라는 기호로 배우의 몸짓으로 드러낸다. 철학적 명제에 비해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합리의 반대말은 非합리가 아니고 反합리이다) 방식으로 설명되어지는 예술은 언뜻 바람직하지 않아 보이기도 하지만 사랑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언어학에서 계열체 바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본 질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의 산물은 예술의 길뿐이다 예술은 사랑을 설명하려 부연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들은 논리적 언어로 인간의 뇌에 고하는 방식을 폐기하고 피부에 바로 막대함과 장엄함을 쏟아 붇는다. 고도의 예술은 모든 인류에 언제나 감동을 선사한다. 이곳에서 다른 철학적 가치관이나 다른 언어체계는 중요한 시점이 아니다 그들은 언제나 가장 세련되고 고도의 기술을 창조하며 쉽게 다가가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렇게 인간에게 말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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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잘 알고 있는 철학과 예술을 굳이 언급 하는 것은 이제 말할 만레이  에게서 가장 전형적인 ‘예술의 죽음’2)을 목도하기 때문이다
전 쟁의 후유증은 윤리적 가치의 내성을 가져왔고 동시성 이론과 같이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발견해냈다 철학자는 말할 것도 없이(사실 프로이트는 심리연구가라는 측면에서 철학자이다)이제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관념적 세상을(무의식적)일상과 사물에 투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이해되지 못할 개념작품(conceptual art)의 설명서를 제시한다. 한 장의 사진과 한 점의 물건(그것도 ready made를!)에 수십 페이지의 기획의도를 나열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직관적 시선을 가진 예술가흉내를 냈다. 철학과 예술에 차이의 틈새에서 근원적 무게를 버림으로써 세련되어지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보드리야의 말대로 이차적인 응용의 무게는커녕 무게를 짊어지려는 시도조차 없어 보인다. 물론 시기를 조금은 달리하지만 잭슨폴락의  에너지적 그림과 짐 모리슨의 파워코드 음들은 전위를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시도 한다(그들에겐 감흥이 우선순위이다)
예술적 센스는 초현실적이고 관념적인 사고를 했고 그중 폴락은 머리로 이해되지는 않지만 감동의 나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키리코나 만레이는 (어떻게 의도 했든) 빨간 고무장갑을 구성하지만 ‘빨간’ 정열과 열정과 색기(sexual)와 생명과 신화가 빠진 채 고무냄새가 나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 설명하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아방가르드3)적 클럽을 만들었다 그 다다클럽은 버니지아울프의 누드를 찍을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견고히 할 뿐 이였다(문화적 사교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현학적 클럽의 모임은 이미 예술사에 이렇게 남은 것으로 무가치한 시도를 인정 하면 된다.
예술을 사랑했고 사진을 시작한지 1년이 넘은 학생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갤러리의 화장실 변기는(뒤샹) 엄청난 직관의 세계일수 있다 하지만 그곳에 미학이 감동이 없는 순간을 발견 하는 것은 허무라는 단어로 얼버무릴 수 없을 만큼의 날조와 모조, 순모조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만레이의 솔라리제이션 기법이 설명되어진 웹정보를 찾는 것이 쉬운 만큼이나(그들의 독창적 생각이나 시도를 모두 부정 하는 것은 아니다) 먼지배양을 예술만으로 보기는 힘들다. 아니 ‘보기 힘들다’  라는 말에 가치관이 서려있다면 그곳에 감흥이 없다는 것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이번 만레이 사진전에 그의 대표작들과 더불어 몇 점의 사진은 나의 사진예술론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다다이즘의 끝을 보게 했다
그들은 견고하고 현학적인 클럽을 만들었고 고급차를 타고 광대 같은 콧수염을 기른 채 가장 시니컬한 셔터를 눌렀다 하지만 무게를 잃어버린 셔터는 간헐적인 가능성4)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혼성모방을 꿈꾸며 뒤샹의 그림을 재현(representation)아닌 모방으로 그리고 키리코의 가면과 조각을 찍는다. 어떠한 의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작품수의 상당부분은 자신들의 현학적 동지를 프레임에 담는 것에 몰두했다 (심지어 학회에 모인 단체사진 또한 이젤에 담겨져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이제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 홍대 앞 자칭 문화인의 모습(혹은 문화인 연대라는 슬로건)이 떠올려지는 것은 몽매한 시선인가.

나는 편협한 학생이다.
하지만 그들을 소개하고 있는 큐레이터에게선 분명 그들이 행했던 ‘예술’이 아닌 모임자체와 다다에 대한 선망 그리고 그것을 소개하는 자의 동일시적 자부가 있었다.
아방가르드적(?) 큐레이터와 만레이의 사진은 바로 이러한 편협하고 옹졸한 글을 가능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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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hilosophy 는 ‘sophy’ 지혜, 지식을 ‘phil’ 사랑하는.. 이라는 뜻의 어원을 기초로 하고 있다 즉 철학자는 우리와 다른 별나라의 관념적 사고를 연구하는 자가 아니라 기본적인 인간의 상식을 항상 관심에 두고 있는 사유인적 개념으로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2)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워홀의 팝아트 클레드카훈의 self-portrait 키리코의 회화 등에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예술의 죽음이다 그러나 이들은 빠져서 안 될 유명한 예술가로 예술사에 남았다 현대예술에서 나타나는 자살의 게임을 선처한다 해도 ‘예술’에서 미학이 없어지는 순간을 그것도 일종의 갈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의 대표격일 것이다.

“자기 자신의 사라짐과 자기 대상의 사라짐을 이용하는 예술은 여전히 중요한 활동이었다. 그러나 예술은 실재를 빼앗으면서 무한히 반복되는 모험을 하는 것인가? 그런데 대부분의 현대 예술은 정확히 말해서 가치로서의 그리고 이데올로기로서의 평범한 것과 하찮은 것과 보잘것없는 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애쓴다. 수많은 설치와 퍼포먼스에는 예술사에 나타난 과거의 모든 형태들과 동시에 오직 현 상태와의 타협만이 있다 그것은 가치와 타락한 미적 쾌락으로 간주되는 독창성 평범함과 무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평범함은 예술의 이차적이고 아이러니컬한 차원으로 옮겨 가면서 승화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일차적인 차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차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이 된다. 미적차원으로의 이행은 그와 반대로 아무것도 보전하지 못한다. 즉 그것은 제2의 힘을 지닌 평범함이다 그것은 무가치해지기를 바란다. ‘나는 무가치하다 나는 무가치하다’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무가치하다” -보드리야-

3) 아방가르드의 한계는 그들이 행한 예술의 반동으로 다시 한 번 아방가르드를 필요로 한다는 데에  있다 결국 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그리고 포스트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귀결된다.(마르크오제는 현재를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벗어난 post-post의 세계로 보았다)

4) 정확한 작품의 제목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데 인공눈물이 있던 눈물의 사진과 바이올린으로 형상화 했던 여인의 뒷모습 등은 그들의 창조력이 언제나 치기스럽지 않았다는 것에 동의 한다 하지만 여기 서의 낯섬과 이 새로움이 주는 직관력은 가능성의 차원에서만 맴돌고 있다 바이올린(첼로나 여타 다른 악기일수도) 여인은 여체 탐닉적 시선 속에서 다른 형상과 미학적 형상을 보고 있는 현대의 섹슈얼적 영화인 ‘모넬라’나 싸구려 포르노 그라피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이미지이며 눈물의 작위적 연출은 감동의 차원으로 발화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목한 부분은 작가의 의도에 의한 다양한 사이즈와 다양한 각도의 크롭본 이였는데 이것은 이미 사진예술이 벤야민이 지적했던 아우라의 문제를 두 번 벗어나는 형태로 이행되어 왔다는 것이다 절대재현의 불가능성과 그리고 원본을 완전히 무시하는 수차례의 크롭은 모조의 세계를 한층 돕고 있었다.
이것은 절대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다양한 프레임의 크롭본을 보는 것은 절대재현의 문제제기나 다른 시각의 예술보기 보다는 순모조의 증후를 명백히 확인하는 일이였다 사진자신이 절대재현을 일부러 무시하면서 나타나는 잃어버린 아우라의 세계는 거짓의 세계였다. 모처럼 나온 인사동의 발걸음은 거짓의 세상 속에서 허무해지기를 반복했다
(현대의 영화나 여성의 몸에서 비슷한 이미지를 발견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만레이의 작품이 앞서있어서 우위를 선점하고 있는 부분은 없다 그러니까 여성의 뒷모습은 끊임없는 재창조의 과정에서 언제나 뛰어난 모델이 되어왔고 과거의 아프리카 모태적 여성상에서도 여인의 뒷모습은 다른 물신이나 생산적 도구로 바라보기가 익숙한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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