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

고뇌의 차원은 다층적으로 진화한다.

진화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은, 무언가 상황이 낳아지는 것을 말할 법도 한데… 고뇌가 진화하니 삶이 고된 노릇이다.

초등학교 때 이쁜 여학생에게 말 한번 못했던 고민을 가지고

왜 그땐 그랬을까. 그냥 이야기 해볼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말 하는 기술을 알게 되서가 아니라,

떳떳하게 말하고 거부 당하더라도 큰 상처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쯤을 이해해서 일 것이다.

 

사춘기때 더 깊은 고민이 시작되기도 한다. 가끔은 체게바라를 읽으며 국가나 철학따위의 고민도 하게 된다.

이쯤 되면 굉장히 깊은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지만, 참 이상하게 그마저도.. 치기스러운 열정들이 불러온 한 때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뜨거운 것은 곧 식게 된다. 계속해서 뜨거워지면 터지거나 녹아내리기 때문이다. 자연의 섭리다.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에선 아프기도 하고 보통은 나이가 들기도 한다.

그래서 참 다행이도 여기 쯤 오게 되면 대부분은 죽음에 가까운 나이가 된다.

한 평생 잘 살았다 하며 장례식에 온 손주 정도를 더 보지 못하는 것을 그리워 하며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정도만 세상에서 알고 가도 참 많은 걸 배우고 가는가 보다 했다.

그런데 또 새로운 고민이 찾아온다.

예를 들면 현대인이 불안해 하는 이유에 잘 알게 된 노릇이다. 혹은 삶이 불안한 이유를 알게 되는 노릇이다.

다가 오질 않은 미래에 대한 준비나 불안보다는 현재를 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을 알게 된 상태.

미래가 아니라 현재가 중요하다는 진실은 루소의 Emile 이나 프로이트의 항문기에 대한 이해를 했던 것 보단 한 참 더 낳아간 진실이다.

그동안 몰랐던 지식을 알게 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학습’ 이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은 진실이라는 참의 명제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지식을 아는 것과 진실을 이해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삶의 비의를 엿본 많은 사람들은 사랑에 관해 노래를 하거나, 사회로 부터 철저하게 격리되 미치거나, 그도 아니면 자살하기도 한다.

미래가 아닌 ‘현재’의 중요성을 너무 이른 나이에 알게 된 벌일까. 그 이상 세상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무게가 짓눌러 숨을 쉬기가 버겁다. 신의 무게.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운명적 비애에 대한 이해이다. 그래 이것은 무병에 가깝다.

시간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 또 다른 성징이 필요한 시점 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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